3백만원보다 큰 3만원
어릴 때 남들은 우리더러 부자라고 했지만 난 느끼지 못했다.
군것질은 절대 안되고 옷도 다 물려 입는 데다가 맛있는 반찬을
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밥상···.
그것은 아버지의 검소함 때문이었다.
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"미연아, 뭐 먹고 싶은 거 있니?" 하시는 거였다.
"탕수육!"
생각해 보면 내 생일도 아니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.
그리고 탕수육을 먹은 그날 밤 아버지는 멀리 떠났고
다음날 우리는 집과 가구를 차압당해 산동네로 이사해야만 했다.
아버지 회사가 부도 나는 바람에 가정이 풍비박산이 되었던 그 시기,
엄마는 밤마다 전화기를 붙들고 "어음 막았어요?"라며 한숨을 쉬었다.
결국 아버지는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고 감옥에 가셨고
엄마는 아버지 옥바라지에 우리 뒤치다꺼리까지 하면서도
이를 악물어 2년 뒤 작은 우동집을 차렸다.
오기로 가득 차 몸을 사리지 않는 안쓰러운 엄마를 보며
나는 아버지를 더 미워하게 되었다.
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를 할 때도 아버지 직업을 예전처럼
‘사장님’이라고 적곤 했다.
허세를 부리려는 게 아니라 내가 겪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였다.
엄마가 아버지에게 같이 면회 가자고 졸라도 "안돼, 시험 기간이란 말이야.
다음에 갈게"라고 미루기 일쑤였다.
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시던 날,
나는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해 "안녕하세요?"하고
바보 같이 인사하고는 방으로 숨어 버렸다.
하지만 아버지는 친구분과 새로운 일을 준비하느라 바쁘실 텐데도
늘 가족에게 관심을 아끼지 않으신다.
"요즘 힘드세요?"란 내 질문에
“아니~, 항상 힘이 넘쳐나는 걸.
우리 미연이 좋은 대학 보내려면 돈 많이 벌어야 하는데" 하고 웃으시는 아버지.
얼마 전 소풍 가는 날 아버지 몰래 주머니에 손수건과 편지를 넣어 두었다.
"용돈으로 주신 3만 원, 3백만 원처럼 생각하고 쓸게요. 힘내세요.
우리가 있잖아요. 우린 아빠를 믿어요. 아빠, 사랑해요."
- 월간 <좋은친구>중에서 -