철부지 시절이 담긴 봉투
방과 후 꼬마들 몇 명을 데리고 교실 청소를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
말 그대로 늠름한 청년 하나가 교실문을 열고는
불쑥 들어서더니 의아해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.
"선생님 이거 얼마만입니까? 저 백규인입니다.
세상에 선생님께서 이렇게 변해 버리시다니"
그러나 내가 반가움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
그를 알아 본 것은 한참 후 였다.
"그래!! 맞아. 이십여 년 전 그렇게도 무우말랭이처럼
빼빼 말라 항상 시들했던 규인이!
어떻게 알고 찾아왔지?"
그가 일학년이던 어느 날인가 한참 음악수업을 하고 있는데
갑자기 "선생님 냄새가 나서 노래를 못 부르겠어요" 하면서
모두들 코를 움켜쥐기 시작했다.
듣고 보니 좋지 않은 냄새가 아까부터 온 교실을 진동하는 것 같았다.
그 당시에는 배곯는 우리 어린이들을 위해 국제 아동기금에서
옥분과 분유를 보내주었고 학교에서는 그것으로 죽이나
빵을 만들어 주었는데, 끼니조차 해결 못하는 가난할 때
허기가 진 규인이는 옥분죽을 너무 많이 먹고
그만 설사를 해버린 것이었다.
핼쑥한 얼굴을 하고 고통과 무안함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를
엉겁결에 데리고 가 씻기기는 했는데 갈아 입힐 옷이 있을 리 없었다.
발가벗은 그를 데리고 관사에 가서 맞든 안 맞든 바지를
얻어입혀서 집으로 돌려보냈었다.
이런저런 그와의 지난 시절을 이야기 하며
그의 아내가 온갖 정성을 다해서 마련한 저녁을 마친 후
과일을 들고 있는데,
"여보, 장롱 밑에 있는 봉투와 가위를 가져와요,
선생님 계신데서 개봉합시다." 하고 그가 얘기했다.
무엇인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
실로 고색이 창연한 비료 푸대가 눈앞에 나타났다.
그 겉면에는 당사의 연도와 '나의 일학년 시절' 이라는 제목,
그리고 '결혼한 후에 개봉할 것'이라는 글이 씌여져 있었다.
문득 나는 옛날 우리 반 모두에게 만들어 준 기념 봉투 생각이 났다.
"선생님, 그동안 수없이 많은 고생을 겪으면서도
이것만은 꼭 간수했습니다. 6년 전 결혼했을 때 개봉할까 하다가
선생님을 모시고 개봉하고자 꾹 참아왔습니다.
선생님, 뜯어주시지요"
봉투에서 나온 누렇게 변색돤 낡은 공책, 그림 그린 도화지,
시험지. 통지표등을 들춰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내외의 모습을
바라보면서 나의 감회는 실로 형언할 수 없었다.
"이것은 돈 주고도 살수 없는 저의 가보입니다.
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. 정말 감사합니다., 선생님"
반세기 동안 교직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무력감이 투명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.
- 출처<낮은 울타리> -